meta name="naver-site-verification" content="577b8ef413b228b8045feff917a229419ec04aa3" /> 끝나지 않는 정체성의 그리움 view 발행 | 詩의 산책 별 2012.07.22 02:39 :: IRA♧

IRA♧

순수한 열정을 닮고 싶은 배움쟁이

  • 2019. 5. 3.

    by. ariariari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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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ttp://blog.daum.net/gawoul/16140371



      끝나지 않는 정체성의 그리움

       

                     박가월

       

       

      혼혈이라는 이유로 애인한테 실연당하고 여행에서 돌아온 아들이 어머니에게 조용히 말을 한다.

       

      “어머니 왜 날 나셨나요.”

      “나는 네 아버지를 사랑했고, 네 아버지는 나를 사랑했다. 건강한 사랑에서 얻어지는 자식을 낳고 싶었다.”

       

      위 글은 펄벅 소설의 [북경에서 온 편지]에 나오는 내용이다. 자식이 부모에게 물어왔을 때 두고두고 생각해 봐도 이만한 명답은 없을 것 같다. 청년시절에 내용이 좋아 이 책을 세 번 읽은 적이 있다. 지금은 이 글만 잊혀지지 않고 생각난다. 나는 사랑을 전쟁에 비유하여 휴전선이 없다고 곧잘 말을 한다. 내 마음이 가는데 총탄인들 막을 수가 있겠는가. 사랑은 인종도 초월한다지만 주변의 강요에 의해 변절할 수도 있다. 펄벅 작가의 통제권에서 의도적이고 문제제기의 요점으로 썼을 것이다. 위의 소설이 모성애의 다부진 교육관을 제시했다면, 아래 시는 전형적인 여인의 섬세함을 보여준다. 여성의 원초적인 생리라고 할 수 있다.

      이산세 시인은 성격이 활달하면서 이 시에서는 한국 여성들이 가지고 있는 미덕을 보여준다.

       

      항아리처럼 부푼 허기진 가슴에

      빗줄기 가득 퍼붓는다

      담아도 채워지지 않아

      오늘도

      한줌의 아픈 사랑을 담아보고

      먼 곳의 그리움도 채워본다

       

      여전히 비는 내린다

       

      세월의 존재 잊고 바람과 노닐수록

      벗들의 애정이 넘칠수록

      살갗 일어서는 주기가 반복되고

      혼자 체화된 외로움

      삭히는 날이 많아지겠다

       

                                이산세 시, 날이 갈수록 [전문]

       

      이 시를 보는 순간 슬프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움의 정체성을 보는 듯하다. 사랑에서 오는 그리움을 억제하며 고뇌하는 시인의 마음을 헤아려보는 관점에서 분석해 본다.

       

      시 전체를 한눈에 보면, <여전히 비는 내린다>를 중심에 두고 부(부는 평자의 의도로 나눔)의 가름 선으로 이용했다. 시인은 1, 2부의 가름을 절묘한 공간 효과를 낸다. 1, 2부의 중간에 여백의 공간을 징검다리 이음새 장치로 <여전히 비는 내린다>를 도입시켜 여백의 활용을 아름다움으로 극복한 공간이용이다. 1부는 사랑이 얻어지는 진행과정을 그리고 있다면, 2부은 사랑을 얻은 후 혼자 삭히고 소화해내는 시인의 인내로 감내하는 아픔을 보여준다.

       

      여전이 비는 내리고 있었다. 만날 때도 그랬고 헤어져 집에 돌아왔을 때도 내렸다. 조용한 공간에서 스치는 그리움을 시인은 감지한다. 여운이 가시지 않은 상태에 바통을 그리움으로 넘기는 과정에서 시는 시작된다.

      항아리를 등장시킨 것은 비 내리는 여름날 장맛비에 쉽게 연상시켜 관련성을 끌어들였다. 그리움이 밀려오는데 채워지지 않는 외로움은 비를 맞고 서 있어도 마음의 항아리에 채워지지 않음을 그렸다. 그리고 <…사랑을 담아보고/…그리움을 채워본다>는 그리운 생각을 많이 떠오르게 하는 노력이다. 보고 싶음을 의미한다. 김소월의 <어쩌면 생각이 떠지나요>와 일맥상통한다. <벗들의 애정>을 삽입시킨 부분은 심리적 자아판단에서 보건데 사랑하는 사람을 두고 직답을 피한 시인의 의도로 유추된다. 시인은 벗들과 어울려 술을 마시고 웃고 떠드는 보헤미안적 문화에서 인간애를 얻은 것이다. 여기에 시인은 그리움이 전이되는 과정을 가까이 있으면서 멀리에로만 느껴지는 마음을, 먼 곳의 그리움이라고 표현한 것이다.

      시간 가는 줄 모르는 보헤미안의 세월에 파묻힘을, 바람에 비유하여 유유낙낙하는 속에서 깊어만 가는 사랑을 <살갗 일어서는 주기가 반복되고>로 표현한 것은 사랑하는 감정이 만날 때마다 주기적으로 일어나는 피부의 팽창을 말한다. 이 부분이 시 전체의 핵심 모체가 되었다. 위에서 밝혔듯이 즉, 누구라는 하나를 <벗들>이란 단체의 용어를 끌어들여 하나라는 것을 희석시킨다. <나> 또는 <너>일 수도 있는 사랑을 드러내놓기가 버겁다는 의미이다. 만남이 반복되는 상황은 좋아하면서도 결국은 같이 지낼 수 없음을 말한다. 쉽게 말해서 혼자 사랑하고 삭히는 것이 괴롭다는 것이다.

       

      혼자 체화된 외로움/삭히는 나날 많아지겠다

       

      시인의 체화된 외로움은 그리움이 쌓여지는 가슴앓이를 말하고자 했다. 시인은 사랑할 수 있는 이유에서 할 수 없는 이유에 맞물려 고심하는 마음을 절실히 드러내는 동시에 감정을 억제한다. 앞으로도 계속 만나고 호흡하며 부딪쳐 나간다는 메시지가 괴롭지만 사랑하기 때문에 참아내는 의지를 보여준다.

       

      사랑 詩이면서 흐름의 깊이가 있다. 무리 없이 내면의 세계를 그려 시로서의 풍부한 덕목의 가치를 발견했다. 지적 부분이 있다면 끝 행에 /삭히는 날이 많아지겠다/의 <다>자 조사 하나의 변화가, 계속과 참아내는 의지가 드러난 것이다. /…많아지겠다/는 벗어날 수 없는 묶임으로 느껴진다. 시인의 의도와는 달리 피해갈 수 없는 결론을 내린 것이지만, 여기에 /…많아지겠지/라는 문장으로 바뀌었다면 피해갈 수 있는 여유로움의 분위기가 딱딱하지 않게 다가온다. 이런 부분은 주의할 점이다.

      인간은 그리움이 없으면 인간으로써 존재의 가치가 없다. 끝나지 않는 정체성의 그리움은 인간이 살아 움직이는 한 존재하는 운명적 사고이다.

      사람이 좋아서 만나고 돌아서면 그리움의 감정이 쌓여 시인을 이토록 외롭게 만들어 시를 쓸 수 있게 만드는 요인이 된 것이다. 시인은 연륜에 상관없이 감수성이 풍부하다. 이런 과정을 겪고 여유로운 마음의 과정을 거친다면 머지않아 묵직한 시가 기대된다.

       

       

      2005.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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